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누스 1세 (문단 편집) ==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 || [[파일:external/www.luc.edu/cosaint1.jpg|width=100%]] || || 아메리카 정교회(O.C.A)의 Mark Meholick 신부가 제작했으며 현재 그가 개인 소장중이다.[* [[https://roman-emperors.sites.luc.edu/icon.htm]] ] [br] 얼굴 밑에 써 있는 글씨는 [[그리스어]]로 ὁ Αγίος Κωνσταντίνος로, 영어로 옮기면 'The Saint Constantine'(성 콘스탄티누스)이다. || 콘스탄티누스는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 받으며, 가톨릭에서도 역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에 콘스탄티누스 동상이나 기마상을 세워 놓는 등 상당히 괜찮은 대우를 받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기독교의 관계는 학계에서도 관심을 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 및 계기, 그리고 그가 진짜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신앙심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어느정도의 호의는 있었으되 기성 종교와 관습을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냉혹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 황제의 신앙심이 아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시절 주화에 사용된 sol invictus(무적의 태양)[* 태양숭배사상의 반영이다. 로마제국에서 솔 인빅투스 숭배의 정확한 기원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로마의 전통신이 아니라 [[아폴로]]와 같이 그리스 또는 로마가 정복한 다른 문화권에서 기원하거나 그 영향을 받은 새로운 정착신이거나 아예 상반된 주장으로 오래전부터 로마의 토착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찌됐건간에 시대별로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긴하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 여러 로마 황제들은 태양신 숭배를 선호해왔다. 태양신 숭배사상을 황제숭배 사상과 결부시켜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주요한 정치수단이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세기간에서도 다른 다신교 아이콘들이 사라져가는 와중에 솔 인빅투스만큼은 주화 등에서 장기간 꾸준히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인용문 참조 ] 표상도 그러한 의견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에 보여준 황제의 태도는 그리스도론 논쟁 자체를 혐오하고 종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에서는 개종의 계기, 과정, 원인에서는 다소간 이견이 있어도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자체에 대해서는 꽤 긍정적으로 본다. >주화는 특별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시대의 주화는, 선전 효과가 매우 크고 백성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주화는 통치자의 교체를 비롯한 정치적 변화를 알리는 뛰어난 수단이었다. 따라서 고대 후기의 주화 주조는 특별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개종의 신뢰성에 관해 제기된 질문과 관련하여, 막센티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곧바로 주화에 그리스도 결합 문자가 나타나는 반면, 콘스탄티누스가 신봉한 명백한 표지인, 4분령의 제신이 사라졌는지는, 주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방에서 주조된 주화에 이따금 이교의 상징이 나타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황제가 발행한 주화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그런 이유에서 '무적의 태양'sol invictus과 같은 표상은 주화에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무적의 태양은 로마 제신이라는 고유성이 없었다. 무적의 태양은 모든 이가 자신이 바라는 종교적 내용으로 채울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천상 존재의 대명사였다. 이교의 주화 주조소들은 이러한 주제를 기꺼이 사용했다. 태양sol의 광휘는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황제에게 태양의 광휘가 소중하다면, 황제는 그것을 정의의 태양인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었다. 태양의 광휘는 이교인 특사들에 의해서도 해명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진정 그리스도를 신봉할지라도 '정의의 태양'sol iustitiae에 대한 신봉이 이교를 단연코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교인은 태양의 상징을 자신들만의 고유한 내용으로 채울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광휘를 덧붙였다면 태양신을 탈그리스도교화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책 속 주석) DÖRRIES, ''Konstantin''(30쪽) 42.190: Abb. 8,1f; BLEICKEN 38-43.] >---- >-에른스트 다스만, [[https://bundobook.co.kr/goods/view?no=6591&setMode=pc|《교회사 I》]][* 원제: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42쪽 우선 주화의 경우, '무적의 태양' 표상이 나타나지만 이건 로마 제신이라는 고유성이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개종은 늦어도 312년이나 바로 그 전날에 일어났다. 황제는 314년에 열린 아를 교회회의에 모인 주교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하느님의 영원하고 상상할 수 없는 거룩한 경건은 인류를 결코 더 이상 암흑 속에 있지 않게 하고 많은 사람의 추악한 악의가 이와 같이 만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경건은 반짝이는 빛으로 구원의 길을 다시 새롭게 비추고 정의의 규범으로 개종하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허용합니다. 저는 많은 본보기에서 이를 알았으며, 스스로 체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제 안에는 정의가 없는 사물들이 있었고, 저는 은밀하게 숙고하는 것을 지극히 높은 권능께서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어떻게 끝내겠습니까? 악이 넘친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꼐서 제가 얻지 못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천상의 은총으로 당신의 종인 저에게 주신 것은 확실히 표현할 수도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책 속 주석) 옵타투스 『도나투스파 열교』(부록) 5; 번역: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183f; 편지의 일관된 특성과 개찬 가능성에 관해서는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185-91; GIRARDET, ''Reichskonzil'' (46쪽) 168. Abn, 21; RITTER, Alte Kirche 123 참조.] >이는 개종 고백처럼 생각되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황제가 이 글을 썼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가 아니면 누가 자신의 과거를 이처럼 예리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만, 편지만으로는 개종이 얼마나 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황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상像이 교회의 교의적·윤리적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다. 글귀를 보면 고백은 철학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개종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더 고상한 행실에 관한 체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에 대한 자의식, 백성의 운명을 보상과 벌로 해석하는 것을 담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일부를 이룬다고 느낀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으로 이해된다. >__전체적으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종교적 태도에 관한 평가는, 개별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고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연구에서는 놀랍게도 긍정적이다. 즉, 콘스탄티누스를 그리스도인으로 본다. 그는 정치적 합목적성에 바탕을 둔 고려뿐 아니라 내적 확신에서도 자신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국가로 실현되는 발전을 원했고 촉진시켰다.__[* (책 속 주석)DÖRRIES, KRAFT, LIETZMANN, VOGT 등의 주장이다. 참조: ALAND 239. BLEICKEN (64-6)은 이러한 견해를 내세우는 데 주저한다.] >그런 이유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종의 진정성을 의심할 까닭이 없다면, 콘스탄티누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중요한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개종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책 속 주석) 문제점에 관해서는 P. STOCKMEIER, ''Glaube und Kultur'' (Düsseldorf 1983) 60-105.236-53, 특히 252f 참조.] 콘스탄티누스가 개인적 확신에서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 같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늘 생각해오던 '최고의 신'summus deus, 참된 무적의 태양, 밝게 빛나는 신성을 이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입법과, 특히 312년 이후 곧바로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교회 건축물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 황제의 종교정책에서 제의가 강조된 것은[* (책 속 주석) R.M. GRANT, ''Chrsten als Bürger im Römischen Reich'' (Göttingen 1981) 169-73; H. BRANDENBURG, ''Römische frühchristliche Basiliken des 4. Jhs.'' = Heyne Stilkunde 14 (München 1979).] 개종의 종교적 특성을 드러낸다. 한편 콘스탄티누스가 죽기 직전까지 세례지원자였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그는 평생 한 번도 어떤 성찬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 곧 그가 자신의 신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으로 바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그를 내적으로 사로잡은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회개라는 성경의 의미에서 개종했느냐는 의문은 로마 종교성의 견지에서는 제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에 대한 평가에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비판 없이 황제의 정책에 얽매였다는 비난은 그의 개종 문제와 얽혀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보인 호의의 표시, 영향력과 권력의 제의提議를 교회가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정치가인 동시에 교회를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했다면, 이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새로운 전제에서 발전해 나가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올바르게 평가하자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 >-같은 책, 44-46쪽 전근대 정치인들이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만 했을 뿐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현대인들의 편견과 달리, 콘스탄티누스 개인의 신앙심을 의심할 이유는 딱히 없다. >324년, 곧바로 황제는 논쟁을 시작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와 사제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에 관여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절친한 친구 코르도바의 주교 오시우스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보낸 편지가 남아있으며, 친저임이 확실하다.[* (책 속 주석)KRAFT, ''Religiöse Entwicklung'' (37쪽) 217.] >>승리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에게. 이 일에 관한 본인의 의도는 두 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본인은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를 위해 본인은 제 행위의 협력자이며 만물의 하느님이신 구원자를 증인으로 모십니다. 첫째로 본인은 모든 백성의 종교적 지향이 일치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느 정도 심한 상처를 입은 모두에게 공동인 지구의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결합하기 바랍니다. 본인은 이를 주시했고 한편으로 인식의 비밀스런 빛에서 저울질해 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무장한 팔의 힘으로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우 본인은, 하느님의 모든 종 가운데 제 기도에 따라 공동의 단결을 이룰 수 있다면, 국가 제도도 모든 이의 경건한 신념을 통해 적절하게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군사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교육을 통해 장려되어야 하는 것을 정확히 구분했다. 제국의 일치에 관한 정치적 측면은 신앙에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중략) >>전능하신 하느님, 제 귀가, 더 심하게는 제 마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까! 본인이 아프리카에 남긴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논쟁이 여러분 사이에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지역이 다른 지역들을 치유해 주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여러분의 지역에 더 큰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논쟁의 발단과 대상을 살핀즉, 구실은 시시하고 그리 엄청난 불화를 일으킬 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점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잘못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아들 예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문제였다. 황제는 일치를 위해 논쟁을 의식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왜곡하고자 했나? 일치만 된다면 교의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나? 이로써 사람들은 이미 인용된 비난을 계속한다: "진리 대신에 정치". 하지만 그리스도교적으로 돌려 말해 단결이 문제라면, 사랑의 계명이 계속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일치concordia는 로마의 사상에 근거를 둔 목표였으니, 다른 모든 것은 이 목표에 굴복해야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 논쟁의 발생과 배경에 관해 무엇을 알았으며, 적어도 무엇을 안다고 둘러대었는가? >>본인이 들어 알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대 알렉산더는, 그들 가운데 각자가 [구약성경] 율법서에 쓰인 구절에 관해, 오히려 쓸데없는 질문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대의 사제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그대 아리우스는, 그대가 처음부터 알 수 없거나 침묵으로 무시해야 하는 것을 경솔하게 답변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 가운데 불화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부인되며, 거룩한 백성이 둘로 분열되고 한 몸이라는 일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고 여러분의 동료 일꾼이 정당하게 조언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논쟁은 쓸데없고 논쟁의 발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지 성경 구절, 아마도 신적 지혜가 말하는 잠언 8장 22절의 해석을 두고 싸웠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당신의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 길의 처음으로 나를 지으셨다." 콘스탄티누스는 논쟁을 철학적 토론의 영역으로 떠넘겼다. 곧, 개별 문제에서는 당연히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토대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신학 전문가들의 다툼에 백성을 끌어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에 관해서는 신앙 안에서 파악된 이해만 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와 다른 이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관해 각기 통찰력을 동원하여 생각해 낸 것은, 그들이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면, 사상의 비밀을 지키면서 그들 정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 (책 속 주석)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2,64-72; 번역: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37쪽) 213-6.] >---- >-같은 책, 91-93쪽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론 논쟁에 부정적이였던 것은 맞으나,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는 경우엔 신학 전문가들 논쟁으로 백성을 분열시키지 마라는 쪽에 가깝지, 종교 자체를 냉소적으로 본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당장 오늘날에만 하더라도, 학문적 최전선에서 열심히 구르는 신학자들이나 가능한 논쟁에 일반 평신도를 끌어들이는 것에는 충분히 비판 의견이 나올 수 있으며, 그 비판자가 종교에 진지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